시계, 기억, 주사위


시계, 기억, 주사위 (2020)


연극과 응시의 주체 : 연극의 영상화에서 다루어져야 할 응시의 지점과 연극의 전시.

 

연극을 영상화 한다는 것은 어쩌면 지금까지 한 번도 고려되지 못했던 하나의 지점이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시도들이 있었겠지만 연극이 가지는 대면의 가치는 연극이 그 자체로서 여전히 유지되고 또 유지될 수 있는 가치들이다. 

그러나 그것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다. 다시 말해 연극에서 응시의 주체는 배우와 관객이며 이들은 서로를 직접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배우는 객석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관객을 인지하고 있으며 관객은 배우가 무대 위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동시에 인지한다.

 ‘본다.’의 관점이 아니라 ‘보고 싶다.’라는 의미에서 응시의 지점은 역시 이런 욕망의 장에서 펼쳐지는 단순한 시선이 아니라 바로 그 주체로서의 응시이다. 


 그러나 영화는 응시의 지점에서 좀 다른 부분이 있다. 배우는 관객과 직접적으로 서로를 인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항의 가운데에는 카메라가 있다. 

배우는 카메라를 인지하며 관객은 카메라에 찍힌 것을 인지한다. 배우와 관객, 카메라라는 이 세 항은 두 장르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이다. 

물론 응시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응시는 여전히 ‘보고 싶다’의 영역에 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여전히 우리를 어떤 이야기로 끌고 들어간다. 

물론 지금 바로 이 응시의 세 항을 완전히 전복할 수는 없다. 지금은 그 전에 해결해야할 문제들부터 해결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을 영상화시키는 작업은 어떤 다른 ‘보고 싶다’의 지점에서 시작한다. 

영화가 가장 실제적인 상황과 환경에서 보다 영화적인 혹은 상상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연극은 가장 상상적인 무대에서 보다 실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이 구분을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지만 영화는 보다 영화적인 이야기를, 연극은 보다 연극적인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상상과 실제에서 응시의 지점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방금 이야기한 배우와 관객과 카메라라는 세 항을 전복하기 전에 해야 할 바로 그 차이이다. 영화의 상황과 환경이 보다 연극적이라면 어떨까. 

이것은 영화 ‘도그빌’에서 충분히 보여 졌다. 영화 ‘1917’의 롱 테이크는 마치 하나의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연극의 상황과 환경이 보다 영화적이라면 어떨까. 그러나 아직 그것은, 비교적 불가능했다.

 


우리가 올해 영화로 제작한 <시계, 기억, 주사위>는 2018년에 초연된 극장 공연으로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때문에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장 잘 매치되었다. 그렇다면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어떤 것인가. 

어느 날 일상을 살아가는 네 명의 강박을 가진 인물들에게 느닷없이 누군가 찾아와 곧 사이렌이 울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실재로 사이렌이 울리고 느닷없이 찾

아온 누군가는 ‘재난’이 다가왔다고 하며 다시 사이렌이 울리면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삼가라고 한다.

 

여기서 다시 하나의 지점, 즉 상상과 실제의 응시의 지점들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무대와 환경은 극장의 공간이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실제의 집도 아니다. 낡은 창고나 벙커 같은 콘크리트가 훤히 보이는 어떤 환경이다. 이것은 상상인가. 

실제로 이곳에 살고 있는 공간에 단지 책상과 의자들, 소파만 있다. 이것은 실제인가. 그리고 이들은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사이렌이 울린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번에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것은 상상인가, 실제인가.


이들이 사는 삶은 분명 실제의 삶이다. 

우리는 누구나 작게 혹은 그보다는 좀 크게 강박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 누군가가 찾아와 언제든지 일상의 삶에 균열을 일으킬 사건들을 만들어 낼 때가 있다. 

그것이 사람이든 이념이든 사물이든 관계없다. 그것은 늘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 상상과 실제가 뒤섞인 공간과 사물들과 인물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권력을 가지고 이것을 ‘보고 싶어’할 것인가. 혹은 보지 않으려는 욕망도 같이. 

우리는 영화를, 연극을 그 어떤 매개를 가지고 보는 것일까.

영화도 연극도 모방이자, 원본인 삶의 복사물이라면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그 복사물을 통한 실제의 삶일 것이다. 

물론 삶 자체가 원본인지에 대한 문제는 일단 넘어가자. 무엇을 봐야하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응시의 지점은 연극이 가지는 대면이라는 바로 거기서 오히려 가장

대립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연극과 영화란 장르가 가지고 있는 그 당연한 결과물들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 연극이니까. 영화니까. 

응시는 거기서 멈춰있다. 그것을 단순히 뒤섞는 것이 답이 되진 않는다. 그것을 전복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시도들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거기에 답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것들을 분할하고 구상하고 다시 재조립할 여지는 있지 않겠는가. 

처음 잠시 말한 응시에서 권력의 구조는 욕망의 장 안에서, 역시, 또한, 새롭게 재조립할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상상과 실제가 표상, 환상, 상징까지 더해져 다시

 ‘~되기’가 된다면 이것은 또한 새로운 모방을 가져올 수 있지 않겠는가. 이 ‘~되기’란 실제의 삶이라는 원본이 복사물로, 그리고 다시 원본으로 되돌아오는, 

즉 비로소 오랜 숨을 그토록 비슷한 강도로 유지해 온 연극에 다시 한 번 크게 들숨을 가져 올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들을 ‘전시’했다. 

전시장의 한쪽 벽에서는 큰 화면으로 영상이 나오고 전시장은 영상이 나오는 무대를 그대로 구현했다. 소품까지도. 

관객은 영화를 보는 것일까, 연극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영상에서 나오는 인물들의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바로 그 소파에 관객은 앉아 영상을 보는 행위. 

관객들은 거기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것도 예약제로 하루에 단지 몇 명만. 

그런 느닷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언제나 그 특유의 질감으로 보여 질 수 있다. 

그리고 연극이 하루에 5회씩 매일, 몇 달씩 보여 질 수 있다면.

 

이것이 연극의 영상화에 대한 충분하거나 온전한 답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연극이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 만일 계속해서 대

면의 가치들이 점점 더 사라진다면 어떻게 그 숨을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연극이 변화해야하는 시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유

지했던 것만을 추구한다면 연극은 도태되고 말 것이다. 물론 또한 영상화만에만 그 답이 있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없이 그 답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연극의 유일한 가치이며 때문에 연극은 그 자체로 계속 존재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