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산, 주체를 벗어나 되돌아온 인간.
그리고 신체적 연극.
-서양 철학사를 횡단하는 변용으로부터의 재생산
개념들을 들여다보면 어떤 힘 아래에서 개념들의 구성요소들이 어떤 관점이나 속성들을 변화시키는지, 그래서 어떤 힘의 문제들에 의해 변형되는지 또한 어떤 힘 아래에서 그 문제들 스스로가 새로운 개념들의 창안을 강제하는지, 그래서 결국 어떤 힘이 그 모든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해결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있다. 개념은 늘 다양하게 형성되고 창안되어 왔고 그 구성요소 역시 누군가에 의해 정해져 왔다. 그것이 서양 철학이 해온 업적이고 그 업적은 잘 드러나진 않지만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일상적인 개념 속에도 나타난다.
특히 서양 철학사를 되돌아 볼 때 언제나 하나의 개념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바로 주체에 대한 것이다. 주체라는 개념 즉, 보편적인 혹은 개별적인 존재 사이를 규정지어야 할 때 우리는 질문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질문이 문제다. 어떤 수단과 항으로 질문하는 가, 어떤 방식으로 제기되는가. 어떤 조건으로 질문되는가. 혹은 할 수 있는가. 이 모든 문항에 대해 주체는 다른 방식으로 답할 것이다. 혹은 모든 질문을 뭉뚱그려 하나의 질문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주체는 늘 그래왔다. 주체는 역시 우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우리도 주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주체라는 개념은 애초에 그 모호함들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 문제들을 결정하고 제기하는 ‘힘’에 대해 다시 질문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언급되어야 하는 유일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힘은 주체를 결정짓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질문들 이후에 다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그것도 주체가 확장되어서.
서양 철학사는 자기 배려(자아 실현, 인식)의 주체 - 자아 의심의 주체 - 자아 이성(비판)의 주체 - 자아 가치라는 주체 - 자아 무의식이라는 주체 - 타자로서의 주체 혹은 언어, 무의식으로의 주체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의 주체가 새로운 장과 새로운 출현 속에서 다양하게 새로운 기능을 건설하고 발견하고 변용시켰다. 보편화의 기능, 인식의 기능, 인격화된 개별화의 기능.
그러나 주체는 이제 그 모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부모가 사라진 아이가 있었다.” 로 시작되는 신화가 등장했다. 코기토는 녹아 없어졌다. 신은 죽었지만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살아 있다. 그것도 총, 칼을 들고 서로를 향해 겨누면서.
주체의 생산은 해방되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개념으로, 개념으로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체가 어떤 동인 아래에서 힘이 변형되는지 어떤 동인이 새로운 주체를 구성하기를 강제하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0. 삶의 양태를 결정짓는 유일한 구성이 주체밖에 있을 수 없는가.
0. 주체가 스스로를 구성하는 결정-관계들에서 벗어나고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결과들과 자신과의 관계에서 물러나며, 결과 주체가 그 자체와 결별하고 관계를 무너뜨리며 동일성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그런 경험은 있을 수 없는가.
0. 주체가 욕망하는 타자의 욕망이 다시금 그 스스로 욕망하는 것이 되는 그런 순간이란 즉, 결국 주체를 벗어나 다시 되돌아 올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재생산이 있다. 단순히 다시 생산하는 것이 아닌 주체에서 벗어나는 것. 주체를 벗어나 되돌아온 인간이 하는 생산이다. 이것이 재생산이다.
그러므로 재생산이란 다음과 같다.
재생산은 우선 생산을 횡단한다. 이 생산은 끊임없이 생산품을 만드는 신체 기계들의 욕망적 생산이다. 그리고 삶과 죽음을 향한 생산이 횡단하는 곳에 무의식이 있다. 무의식은 거대한 저장창고이다. 신체 곳곳에 기억들과 억압들이 새겨져 있다. 그것들은 부유한다. 온갖 것들이 부유한다. 그 부유가 다만 떠다니기를 그만두고 틈을 찾는다. 생산에 들러붙어 생산품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톱니바퀴가 돌아간다. 기계가 일을 시작한다.
모든 쾌, 불쾌를 가장한 쾌나 불쾌, 적극적인 힘과 반응적인 힘 혹은 적극적 반응적 힘. 의식의 환상 즉, 강박, 히스테리, 나르시시즘, 공포와 불안, 저항, 고착, 전이, 사디즘, 마조히즘, 소외, 망각, 부정, 우울, 단절과 pause, 떨림, 여운, 반복, 차이, 중첩, 허상, 고립, 전위, 회귀, 투사, 자폐, 공황, 신경 쇠약, 이 모든 신경증들. 이 모든 억압들.
더, 더, 더 있다.
기계가 일을 시작할 때, 톱니바퀴가 돌아갈 때 즉 욕망적 생산이 생산품을 만들기 직전 신체는 가끔 톱니바퀴를 정지시킨다. 그리고 톱니바퀴의 이를 갈아버린다. 톱니바퀴의 위치를 뒤바꾼다. 재조립된 톱니는 다시 물린다. 이것이 횡단이다. 생산을 횡단한 생산은 다시 생산품을 만든다. 재생산이다.
그것은 무언가 부숴야만 만들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낡은 무언가를 부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새롭다고 생각하는 것, 오히려 그렇다고 생각 되는 것들을 부수는 작업이다. 억압을 지켜보고 그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물인 생산품도 만져보고 생산품에 들러붙은 온갖 것들을 끄집어내고 최초의 부유까지 들여다봤을 때.
생산을 횡단한 생산은 환상에서 벗어나 기계들의 얽힌 톱니바퀴를 때려 부수고 그 이들이 다시금 맞물릴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생산을 멈추고 톱니바퀴에 다시 기름칠을 하고 기계인 신체, 그리고 그 신체의 주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다시 한 번 질문 할 수 있다. 아니, 질문은 아직.
다시 말하자면 신체를 통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으로 말해질 수 있는 재생산은 서양 철학사를 관통해 온 ‘주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대안이다. 주체는 늘 그 안에서 사물을 바라보고 관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서양 철학사의 주체는 욕망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이제 겨우 무의식과의 연결 고리를 찾은 것이다. 재생산은 현재의 욕망이 – 특히 타자의 욕망이 - 새로운 대상을 찾기 위한 과정이며 무의식과의 연결 고리에서 선택하는 것들을 뒤바꿈으로서 새로운 욕망의 속성을 제시한다. 달라진 무의식과 욕망의 메커니즘은 치유이며 특히 많은 신경증이 대상으로 삼는 바로 ‘그 주체’를 벗어나게 만드는 일이다.
변형된 생산, 극복된 생산, 해방된 생산. 이 세 단계를 재생산으로 가는 과정으로 본다. 이 과정들 이후 진짜 욕망이 드러난다. 거기에는 거짓이 없다. 욕망의 환상도 의식의 환상도 없다. 그러면 대상이 달라진다. 결국 재생산의 결과는 대상이다. 재생산은 결국 다른 대상을 욕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욕망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니.
그러므로 재생산이란
1. 쾌와 반복에서 벗어남. 동인을 들여다보는 일. 불쾌에 눈 돌리지 않는 일. 무의식을 의식으로 꺼내는 일, 그러나 환상 없이 꺼내는 일. 초자아에서 벗어나는 일. 그래서 타자를 이해하는 일. 원으로 태어난 스스로를 다듬어 각형으로 만들고 그 각형을 기계로, 특히 사회적 기계인 톱니로 만들어 그 틀 안에 들어가 스스로부터 돌아가는 힘으로 사회를 돌리는 톱니를 만드는 일.
2. 극복된 생산, 변형된 생산, 해방된 생산. 이 일련의 과정의 끝에 있는 생산, 초자아에서 벗어난 생산. 즉 억압에서 벗어난 생산. 그 이후 무의식과 욕망의 메커니즘 안에서 그 결과가 드러내는 환상의 알고리즘에서 벗어나 혹은 그 안에서 자유롭게 그 스스로 원하는 욕망이 만들어 내는 생산. 즉 주체를 벗어나 되돌아온 인간의 생산.
그리고 이후에 제기되어야하는 하나의 질문.
“그래서 너의 재생산은 뭐라고?”
그래서 신체적 연극은 무엇인가.
“신체적 연극의 요체는 무엇을 증명하는데 있지 않고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데에 있다.”
“신체는 우연의 욕망들이 충돌하는 무대이고 무의식은 거대한 저장창고이며 의식은 조명이고 감각은 무대장치이다. 그리고 의지야말로 신체가 춤추는 연극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났을 수도 있다.
일은 힘을 생산해 낸다. 힘들은 그러나, 존재하지 않을 수도 아직 톱니바퀴가 물리기 전의 다양체에 머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일은 즉, 생산이다. 끊임없는 생산에 우리는 노출되어 있다. 그것은 개념이지만 개념으로만은 남지 않는다. 생산은 행위가 된다. 설사 그것이 행위로 생산되지 못할지라도 그 역시 행위이다.
행위의 톱니바퀴를 돌리는 것는 신체이며 이 신체는 우선 개념이다. 이 신체는 그래서 아직 다양체를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유마저도……
손으로 물건을 잡는다.
이동한다.
먹는다.
부딪힌다.
배설한다.
신체의 부분들, 역할들, 구조들. 톱니바퀴가 된다. 곧 생산이 된다.
힘들이 종합된다. 이 종합은 변형된다. 우리 각 신체의 기계들. 말하는 기계, 먹는 기계, 쓰는 기계, 사유. 이 모든 기계들이 행위를 발견한다. 신체는 반응한다. 비로소 신체는 개념에서 행위가 된다. 힘이 된다. 변용된다.
신체가 행위가 되는 순간 그 일은 이미 존재하게 되고 힘들이 종합된다. 이제 그 일은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 우리의 눈앞에서……
‘신체를 통한 억압의 재생산’이라는 모티브로 시작된 ‘신체적 연극’은 신체를 보다 구조적으로 텍스트화한 연극이다. 즉 신체가 텍스트로 된 연극에 결합된 가장 이상적인 형태를 말하며 때문에 신체 자체가 텍스트가 되어 관객에게 전달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대본 속, 각각의 인물이 가지는 ‘주체’라는 다양하고 복잡한 개념을 대본 속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통해 구체화시키고 이를 통해 각 인물들의 무의식에 접근해 그것이 어떻게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지, 결국 그 주체가 늘 다루어진 형태를 벗어나 어떻게 결정지어질 수 있는지, 결국 이는 억압의 구조를 통해 주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인 ‘재생산’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신체적 연극은 어떤 대안이 아니다. 더 나은 연극의 방향도 아니다. 이것은 다만 새로운 장르이다.
즉, 신체적 연극은 재생산의 모델이다.
때문에 신체, 텍스트화 된 신체와 텍스트가 서로를 횡단해야 한다. 신체가 그 자체로 연극의 텍스트를 세분화하고 기능화하며 특히 감정에 호소한다면 반대로 텍스트가 신체를 사유화하고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관객을 납득시킬 때 신체적 연극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신체적 한계는 결국 이야기로 극복되고 이야기의 한계도 마침내 신체로 극복되기 때문이다. 또한 서양 철학사의 주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인 재생산을 제시하는 모델로서의 이 연극은 극 속의 인물을 통해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구체적인 방법, 이것이 중요하다. 재생산이라는 개념도 신체적 연극이라는 개념도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양한 단어들로 재생산은 언급되어져 왔다. 그러나 언제나 중요한 것은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냐는 것이다. 그래서 신체적 연극은 극 속의 인물들을 통해 그 방법을 제시한다.
신체적 연극은 재생산을 위한 생산으로서, 해방이, 기계들이 춤추는 무대이다. 해방이 마침내 텍스트가 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납득하게 만든다. 해방된 신체가 행하는 생산, 주체를 벗어나 되돌아온 인간이 행하는 생산, 즉 재생산이다. 그리고 그 재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텍스트와 신체화된 텍스트로 행하는 것. 그래서 신체적 연극이다.
새로운 병이 도래했다. 재생산이라는 병이. 치료법은 간단하다. 주체 속에서 안심하고 주체 속에서 자아를 찾고 주체 속에서 머무르려 하며 주체 그 자체이면 된다. 언제까지나 주체, 주체, 주체이다. 그러나 재생산이라는 이 병은 삶과 죽음을 횡단하며 삶도 죽음도 그 자체이며 삶 또한 죽음처럼, 죽음 또한 삶처럼 만든다.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동인을 끝까지 찾아내려하며 무리 속에서 무리가 아닌 것을 솎아 낸다. 다시 힘에 반응하며 그것이 환상의 질서인지 혹은 단순히 두려움인지 알아챈다. 공정한 판단이란 없으며 선도 악도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힘의 강도를 경험함에 있어 예상치 못한 미소를 띠우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으며 극복된 생산이란, 변형된 생산이란, 해방된 생산이란 바로 어떻게 컵을 잡아야하는 지에 관해 말해지는 것이라는 것도 안다. 컵을 어떻게 잡는지, 이 단순한 행위에서 신체적 연극은 시작됐으니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 본질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본질은 새로이 말해 질 수 있는 것이다.